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말메디 학살 (문단 편집) == 여담 == 파이퍼는 1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1956년 12월 13일 감형으로 풀려났다. 석방 후 '''전직 SS 모임'''의 주선으로 [[포르셰]]에 취직하여 해외 판촉 직원으로 일하려고 했으나 전범으로서 외국의 기피 인물이었기 때문에 곧 퇴직하였다. 이후 이탈리아 전선에서 민간인을 무차별로 폭격한 보베 학살(Boves massacre)에 대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보베 학살은 [[이탈리아]] [[파르티잔]]이 독일군 몇 명을 억류한다는 이유로 350채 가옥을 평지로 만들고 45명을 사살한 사건이다. 하지만 무죄로 결론난다. 이후 프랑스에 정착하여 가명을 쓰고 신분을 감추면서 자동차 잡지에 가명으로 기사를 투고하거나 밀리터리 서적 번역 일을 하다가 결국 신분이 노출되고 말았다. 1976년 파이퍼는 암으로 투병하던 아내를 먼저 독일로 보낸 뒤 프랑스에 남았다. 그는 프랑스 [[극좌]] 테러리스트들로 추정되는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가슴에 총을 맞고 죽었으며 집은 불탔다. 괴한들은 [[자업자득|아무도 기소되지 않았다.]] 말메디 학살 당시 베레트(Wereth) 지역에서 고립된 흑인 미군 포로 11명이 SS에게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했으나 SS는 그들을 잔인하게 구타했다. 전신을 마구 구타한 뒤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턱을 짓뭉개고 양쪽 팔뼈를 부러뜨렸다. SS는 포로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일부러 급소만을 피해 고문하는 악 마같은 짓을 저질렀다. 손톱을 모두 뽑은 뒤 손가락을 절단했으며 이빨을 모두 뽑아 버리고 마지막으론 총검으로 눈알을 파내거나 움직이는 차량으로 산 채로 몸을 짓뭉개는 등 총살형이 아닌 끔찍한 고문을 통해 살아 있는 포로들을 학살하였다. SS가 보여준 일본군 못지 않은 잔혹성에 미군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며 지휘부에서는 이러한 만행의 범인들을 추적했으나 증거가 부족했던 탓에 안타깝게도 아무도 기소할 수 없었다. 이들은 향후 전투에서 전사했거나 운 좋게 연합군의 포로가 되어 살아남았을 것이다. 학살이 이루어진 베레트 지역에는 학살된 포로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말메디 학살 이외에 독일군이 미군 포로를 상대로 자행한 학살로는 [[그래뉴 학살]]이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독일군이 미군을 상대로 자행한 포로 학살은 그래뉴 학살, 말메디 학살, 이탈리아에서의 미 OSS 정보원 집단처형, [[ https://www.iwm.org.uk/collections/item/object/205195014|룩셈부르크 발하우젠에서 다수의 미군 포로 처형]] (이 사건은 주체가 SS인지, 독일 국방군인지는 불명) 이렇게 총 4가지다. 그래뉴 학살과 발하우젠 학살을 제외한 나머지 학살의 주모자에 대한 처벌은 모두 이루어졌다. 이 외에도 프랑스 마을 주민이 D-DAY 당시 낙오된 미 공수부대원을 독일군이 [[즉결처분]]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다. 특히 SS는 포로를 잡지 않고 즉결처분하는 것을 즐기다시피 하여 연합군의 증오와 보복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행위는 서방 연합군 포로와 [[소련군]] 포로를 가리지 않고 자행되었다. 게다가 지상에 불시착한 미 공군 파일럿들 역시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면 즉결처분당하거나 [[뤼셀스하임 학살|폭격당한 독일 마을 주민들에게 보복으로 살해당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에]] 이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포로 학살 사건은 더 많을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